백제 무왕 42년(서기 641)
봄 3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무(武)라고 하였다. 사신이 당나라에 가서 소복을 입고 표문을 올리어 말하였다.
“임금의 외신(外臣) 부여장(扶餘璋)이 죽었습니다.”
황제가 현무문(玄武門)에서 애도식을 거행하고 조서를 보내 말하였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방도는 총애로운 책명보다 앞선 것이 없고, 죽은 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리는 먼 곳이라 하여도 막힘이 없다. 고(故) 주국대방군왕백제왕부여장(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와서 정삭(正朔, 책력)을 받고, 조공과 글 올리기를 한결같이 하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추도하는 슬픔이 깊다. 마땅히 보통 예법 이상으로 애도를 표하여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노라.”
그리고 부의를 매우 후하게 내렸다.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海 遠禀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慜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중국이 한반도의 여러 왕들에게 추증한 광록대부(光祿大夫) 광록이란 뜻은 "빛나는 돈(헤드젯)"이란 뜻이다.
백제의 무왕도 당나라로부터 광록대부 추증받았다.
신라 진덕여왕 원년(서기 647)
2월, 당 태종이 지절사(持節使)를 보내어 선왕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왕을 주국낙랑군왕(柱國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二月 唐太宗遣使持節 追贈前王爲光祿大夫 仍冊命王爲柱國封樂浪郡王
당고종이 선덕여왕에게도 광록대부(光祿大夫) 추증한다.
단지 광록대부란 추증 때문에 삼국유사에서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에게 시집가는 개기된다.
그래서 선화공주는 선덕여왕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실존인물이 아니다.
백제 무왕의 무(武)자와 김춘추에게 추증된 무열(武烈)은 측천무후의 무자에서 나온 더 후대 추증이다.
신라 당시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조의 개입니다.
진덕여왕 8년(서기 654)
봄 3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 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였으며, 진덕왕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부의로 비단 3백 필을 내려주었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기(新羅記)』에서 “그 나라에서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八年 春三月 王薨 諡曰眞德 葬沙梁部 唐高宗聞之 爲擧哀於永光門 使大常丞張文收持節吊祭之 贈開府儀同三司 賜綵段三百 國人謂始祖赫居世至眞德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末王 謂之眞骨 唐令狐澄新羅記曰 其國 王族謂之第一骨 餘貴族第二骨
진덕왕에게 추증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삼국유사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보낸 꽃씨 석 되의 근거다.
손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진덕여왕을 석굴암 탈해 만든 이상 법신, 보신, 응신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근거가 또하나 만들어졌는데,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 성골(聖骨)로 지칭된 이유는 태양신전을 선호하던 왕들이란 뜻이고,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 신라 마지막 경순왕까지를 진골(眞骨)로 지칭된 것은 아펩신전을 선호하던 왕들이란 뜻이다.
그래서 측천무후로부터 경교쌍룡비 받은 김춘추부터 신라 중부반 왕들이 용이나 뱀과 엮이는 이야기가 많다.
삼국유사 수로부인 이야기나 동지 청지 원성왕, 당나귀 귀의 주인공 경문왕, 헌강왕 때 동해 용의 아들 처용이 대표적이다.
선덕여왕 때 밀본법사(密本法師)의 육환장(六環杖, 고리가 여섯 개인 지팡이)이 아펩신전 침대 뱀이고, 밀본법사와 대결하다가 천천히 거꾸로 떨어져 머리가 땅에 박혀 말뚝처럼 우뚝 선 인혜사(因惠師) 태양신전 헤드젯 역활이다.
신라가 성골과 진골로 구분한 이유는,
성골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는 낮이고,
진골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 신라 마지막 경순왕까지는 밤이라는 뜻이다.
달은 태양신전이 주관하지만 또한 아펩신전 어둠이 주관하는 교차선상에 있다.
낮의 태양신전으로 신라를 열었지만, 밤의 아펩신전으로 신라가 멸망했으니, 신라가 섬기던 두 신전으로 신라의 왕 계보를 나타낸 것일 뿐 이 외의 특별한 이유는 없다.
불교도 두 신전으로부터 시작했으니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정상이다.
현재의 기독교나 유대교와 태양신전 아펩신전을 연관시키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해서 태양신전으로 구분하면 선덕여왕에서 문무왕까지 한 사람이고,
아펩신전으로 구분하면 선덕여왕, 진덕여왕이 한 사람이 된다.
여기에 후대 불교가 개입해서 이 절충안이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보낸 꽃씨 석 되다.
법신, 보신, 응신으로서 석굴암 탈해되겠다.
사관이 논평한다.
삼대(三代, 하ㆍ은ㆍ주)에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를 칭한 것은 모두가 대통일을 이루고서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같은 때에 나란히 일어나 천하를 다투며 양립한다거나, 간사한 영웅이 기회를 얻어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변두리의 소국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나라는 결코 사사롭게 연호를 칭할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이 타고 가는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연달았는데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했으니 이해하지 못할 노릇이다. 그 후에도 그러한 잘못된 연호를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의 나무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때에 와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 할지라도,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고칠 수는 있었다고 할 만하다.
論曰 三代更正朔 後代稱年號 皆所以大一統 新百姓之視聽者也 是故苟非乘時並起 兩立而爭天下 與夫姦雄 乘間而作 覬覦神器 則偏方小國 臣屬天子之邦者 固不可以私名年 若新羅以一意事中國 使航貢篚相望於道 而法興自稱年號 惑矣 厥後承愆襲繆 多歷年 所聞太宗之誚讓 猶且因循至是 然後奉行唐號 雖出於不得已 而抑可謂過而能改者矣
진덕여왕조에 김춘추 이야기 나오고 막바로 사관이 개입해서 간사한 영웅(김춘추)으로해서 역사가 조작됐다고 실토하는 것도 이 맥락이다.
선덕여왕 5년(서기 636)
봄 정월, 이찬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의약과 기도가 효과가 없었으므로,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승려를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론케 하고 1백 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여름 5월, 개구리가 궁궐의 서쪽 옥문지(玉門池)에 많이 모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가까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개구리의 성난 듯한 눈은 병사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서남쪽 변경에 지명이 옥문곡(玉門谷)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이웃나라 병사가 그 안에 숨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하여 병사를 이끌고 가서 찾아보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려고 무장한 병사 5백 명을 이끌고 와서 그곳에 숨어 있었다. 알천이 습격하여 그들을 모두 죽였다.
자장법사(慈藏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갔다.
五年 春正月 拜伊飡水品爲上大等 三月 王疾 醫禱無效 於皇龍寺設百高座 集僧講仁王經 許度僧一百人 夏五月 蝦蟆大集宮西玉門池 王聞之 謂左右曰 蝦蟆怒目 兵士之相也 吾嘗聞西南邊亦有地名玉門谷者 其或有隣國兵潛入其中乎 乃命將軍閼川弼呑 率兵往搜之 果百濟將軍于召欲襲獨山城 率甲士五百人 來伏其處 閼川掩擊盡殺之 慈藏法師入唐求法
선덕여왕 6년(서기 637)
봄 정월, 이찬 사진(思眞)을 서불한으로 삼았다.
가을 7월, 알천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六年 春正月 拜伊飡思眞爲舒弗邯 秋七月 拜閼川爲大將軍
태양신전 섬기는 선덕여왕이 병이 들었다는 것은 석양의 태양처럼 낮의 막바지란 뜻이고,
태양과 상극인 어둠 관련한 황룡사(黃龍寺)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승려들 모아 인왕경(仁王經) 강론케한 것은, 신라불교의 성격이 어둠과 관렸있는 뜻이다.
병을 고치기 위한 태양신전용 어필이 아니라, 경교쌍룡식 어둠이다.
석굴암 탈해가 김대문에 의해 전세(前世) 부처가 된 것은 어둠이 아니라 전적으로 빛나는 태양과 관련이라 석굴암 천정에 태양이 부조되어 있다.
인왕경의 "어질 인(仁)"자는 두 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어둠과 관련있는 한자다. 달은 음양이 공존하는 둘이며 하나다.
병든 선덕여왕을 음양이 공존하는 반달로 표현된거다.
빛에 어둠이 개입했으니 병든거다.
맹자 사단(四端)에 등장하는 인(仁)도 아는 것과 모른 것 달이 기원이다.
황희 정승이 뇌물 먹어가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했던 이유가 음양이 혼재하는 달이 근원이다.
어질다는 인(仁)의 뜻이 이거니까.
밤을 의미하는 어둠도 태양처럼 개념적으로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낮을 어둡게하는 구름아래 어둠도 어둠신의 영역이라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초저녁부터 자시(子時, 23시에서 1시까지)까지 하나, 자시부터 아침까지 하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만, 태양은 그럴 수 없는 독보적인 빛을 가진 하나다.
빛나는 보름달은 보름달, 그믐달은 그믐달이다.
개구리 성난 형상은 달의 음영부분이라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 지방을 포함하는 옥문곡을 지칭하지만,
삼국사기에 옥문곡, 삼국유사에 여근곡은 자장법사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당나라에 들어가면서 쌍낫배와 달이 일본이 아닌 중국땅에 존재하는 기물되며 관련된 역사가 전부 왜곡되거나 숨겨진다.
선덕여왕 6년(서기 637)에 등장하는 서불한(舒弗邯, 펴지 아니한 땅, 쌍낫배는 헤드젯처럼 펴지지 않았다) 직책이 일본 옥문곡에 부임한 태수 직책이다.
사진(思眞)이 옥문곡의 태수가 됐고, 알천(閼川)이 옥문곡 대장군으로 부임한다.
알천 이름이 쌍낫배 알이란 뜻이다.
思眞의 뜻처럼 진짜 생각해야 할 숨겨진 니들 신라의 역사다.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 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狀 尋撿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上天
현재 중국이나 한국은 우물 정(井)자 중심에 점(丶)을 생략하지만, 아직도 일본은 우물 정(丼)자 중심에 점이 있는 한자를 쓴다.
박혁거세 전설에 등장하는 나정(蘿井)은 羅丼이다.
쑥 라(蘿)와 그물 라(羅)의 차이는 풀 초(艹)가 있느냐 없느냐다.
곰과 호랑이가 먹던 마늘은 헤드젯이고, 쑥은 쌍낫배다.
태양과 달은 마늘 낱개 역활이다.
쑥 라(蘿)를 나정 이름에 있으니 번개 빛(일본 열도)과 백마 곁에 있던 나정은 일본 옥문곡을 지칭한 것이다.
백마가 하늘로 올라간 자리에서 박혁거세가 자줏빛 알로 태어났으니 태양으로 태어난거다.
니들 전설의 역사 모든 알들이 태양신전이 출처다.
그러나 후대에 중국의 입김으로 자진해서 사대주의하던 니들이 흉노족있는 중국쪽으로 가게 만들었느냐, 일본쪽으로 갔느냐 그 차이다.
백제 무왕 35년(서기 634)
35년(서기 634) 봄 2월, 왕흥사(王興寺)가 완성되었다. 그 절은 강가에 있었는데, 채색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임금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3월,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에서 끌어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1)을 모방하였다.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嶼 擬方丈仙山
궁남지
https://blog.daum.net/e-chungnam/6034백제 무왕이 만들었다는 궁남지가 왕흥사 중심 본채다.
옛날에는 진입로가 없어서 배를 타고 궁남지 본채로 진입했다.
해서 궁남지를 중심으로 왕흥사가 건립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왕흥사 터로 추정하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 부여 시내에 왕흥사가 있었다는 뜻이다.
거리상으로 거기서 거기지만,
백마강 서쪽에 왕흥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백마강 동쪽에 궁남지와 왕흥사가 모두 있(었)다.
그리고 보름달 모양의 궁남지 관련해서 삼국사기에 중요한 내용이 나오는데,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백제 의자왕 20년(서기 660)
6월,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으로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왕도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에 들어와서 큰소리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 자쯤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게 되는 것이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 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泗沘河水 赤如血色 夏四月 蝦蟆數萬 集於樹上 王都市人 無故驚走 如有捕提者 僵仆而死百餘人 亡失財物 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
둥근 달은 의자왕 때까지는 일본 옥문곡과 달을 백제가 점령한 지역이라는 뜻이고, 백제멸망 이후부터는 옥문곡을 신라가 차지했다는 뜻이다.
문제는 선덕여왕이 삼국통일 주역이 되서 알천과 필탄이 동원된 플랜이라야 가능한 역사라는게다.
단순하게 백제가 서서히 줄어드는 보름달, 신라는 서서히 커지는 초승달이 표현된 것이 아니라 옥문곡의 점령사다.
옥문곡 달 지역은 백제가 점령하고 있었고, 초승달 모양의 쌍낫배 지역은 신라가 점령하고 있었다로 해석하면 백제 장군 우소와 신라 알천 필탄의 전투가 이해될 수 있다, 신라와 거리상으로 가까운 히로시마 나가사끼 지역은 신라가 점령하고 있었고, 거리상으로 좀 먼 백제가 멀리 돌아서 달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선덕여왕이 물리친 백제 장군 우소가 백제멸망과 관련있어 백제 잔당들이 옥문곡 달 지역으로 점령하고 있던 마지막 잔당 세력이라는 뜻이니, 신라가 옥문곡 달 지역을 점령하고 이후에 백제가 멸망했다고 해석해도 되지만, 진평왕 초기에 구칠과 대세가 일본에 들어간 이상 선덕여왕 때 파견된 서불한(舒弗邯, 펴지 아니한 땅, 쌍낫배는 헤드젯처럼 펴지지 않았다) 직책은 오래된 역사란 뜻이다.
신라 초기에 나타난 죽엽군은 미추왕이 옥문곡 출신이라 뜻이라, 신라 김씨들이 일본 출신들이라는 뜻이다.
김알지(金閼智) 이름의 알이 알천과 같은 옥문곡에 본관이다.
흉노 왕비 알(閼) 자가 아니라 옥문곡 알(閼) 자다.
태양신전 쌍낫배 위치로 비롯된 혼란이다.
김알지 [ 金閼智 ]
탈해왕(脫解王) 때이다.
영평(永平) 3년 경신(서기 60)[혹자는 중원(中元) 6년이라고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중원은 모두 2년뿐이다.] 8월 4일 밤에, 호공(瓠公)이 월성(月城) 서쪽 마을로 가다가, 시림(始林)[혹은 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 속에서 매우 커다란 빛을 보았다. 자주색 구름이 하늘에서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속에는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그 빛은 바로 그 상자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이를 왕에게 아뢰자 왕이 그 숲으로 가서 상자를 열어보았는데, 상자 안에는 남자 아이가 누워 있다가 곧바로 일어났으니 혁거세(赫居世)의 옛 일과 같았다. 그래서 혁거세가 자신을 알지(閼智)라고 한 일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라고 이름 붙였다. 알지는 우리말로 어린 아이를 뜻한다. 왕이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왔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오면서 기뻐 뛰어놀고 춤을 추었다.
왕이 길일을 택하여 태자로 삼았지만, 후에 파사(婆娑)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상자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金氏)라고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혹은 구도(仇刀)라고도 한다.]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김씨는 알지에서 시작되었다.
[脫解王代]
永平三年庚申[一云 中元六年 誤矣 中元盡二年而已] 八月四日 瓠公夜行月城西里 見大光明於始林中[一作鳩林] 有紫雲從天垂地 雲中有黃金櫃 掛於樹枝 光自櫃出 亦有白鷄鳴於樹下
以狀聞於王 駕幸其林 開櫃有童男 臥而卽起 如赫居世之故事故 因其言 以閼智名之 閼智卽鄕言小兒之稱也 抱載還闕 鳥獸相隨 喜躍蹌蹌
王擇吉日 冊位立太子 後讓故於婆娑 不卽王位 因金櫃而出 乃姓金氏 閼智生熱漢 漢生阿都 都生首留 留生郁部 部生俱道[一作仇刀] 道生未鄒 鄒卽王位 新羅金氏自閼智始
탈해가 일본 북해도에서 왔으니 김알지도 흰 닭과 관련해 상자에서 태어난다. 여기에 호공이 등장하니 김알지는 일본 옥문곡을 벗어나기 어렵다.
박혁거세 전설과 거의 같지만 백마(한반도)와 흰 닭(일본열도)으로 나뉘면서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둘의 출처가 갈라진게다.